이 책을 처음 본 게 어림잡아 10년 전쯤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때문에 열심히 도서관에 들락거리다 만난 책이다. 알퐁스 도데의 글이라는 건 알았지만 유명한 작가의 글이어서가 아니라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이 어땠었는지 잘 기억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후로 이 책이 가끔 생각나길래 소장하고 싶어 사려고 했더니 절판되었단다. 그래서 그냥 가끔 생각나는 책이 될 뻔했다. 그런데, 올 봄에 수서작업을 하던 중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년엔가 몇몇 사람들과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읽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물론 그때도 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내 마음이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스갱 아저씨의 염소가 측은하면서도 이끌리는 뭔가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번에 이 그림책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평소에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자신을 블랑께뜨와 시인인 피에르에게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선택한 어떤 것들이 비록 현재의 풍요를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끝내 그것을 접지 못하는,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현실을 직시하라는 핀잔을 듣는 내 모습이 시인 피에르 같아서였다. 적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신념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고 싶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아니,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다!) 커다란 명예가 따르는 것이 아니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다.
블랑께뜨가 처음 산으로 갔을 때 마냥 즐겁고 신비롭지만 밤이 되자 안락한 스갱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잠시 느낀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산 속에 있으면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이 뻔하니까. 나였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생각하면 블랑께뜨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블랑께뜨처럼 목숨을 내놓는 것까지는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손해나 불이익 때문에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문득,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내가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또 안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도 '죽지 않고 싶다'가 아니라 최대한 오래 버티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블랑께뜨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그러면서 <오늘은 5월 18일>이라는 그림책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서 안락한 집을 빠져나갔던 누나와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을 이끌던 남자(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부유하고 권력도 있지만 그런 것을 버리면서까지 혁명에 동참했던 남자 주인공의 친구)가 오버랩된다. 물론 블랑께뜨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선택이고 나머지 두 인물은 대의를 위해서라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신념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런지.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그림으로 인해 글만 있는 책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간혹 그림책으로 만들면서 차라리 글책으로 남는 게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그림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림 덕분에 더 기억에 남고 블랑께뜨의 상황과 마음이 쉽게 전달된다. 특히 시인 피에르에게 쓴 글이 다른 글씨체로 다른 면에 배치되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실히 드러난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경우였다면 너무 뻔한 주제를 드러낸다고 싫어했을 테지만 이 경우는 그것조차 좋아보이니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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