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꾸러미를 메고 길을 떠난 늑대가 무지무지 배가 고파서 농장으로 허기를 채우러 간다. 그런데 농장의 동물들은 늑대가 협박을 하거나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다. 자존심에 상처입은 늑대는 그날부터 열심히 글을 읽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된다. 이것은 바로 책 읽어 주기를 할 때 제일 처음 읽어주는 《난 무서운 늑대라구!》의 대강의 줄거리다. 늑대가 학교로 찾아가자 모두들 놀라지만 늑대는 단지 글을 배우러 왔을 뿐이다. 어린이 책에서 악역을 도맡고 있는 늑대가 이처럼 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이야기꾼이 된다는 설정 자체가 재미있다. 앞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속표지 그림에서 심심해하는 동네 사람들과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늑대가 책 읽어주는 모습과 함께 활기찬 동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책은 인생의 필수 도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책 읽기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 기본적으로 책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잡아먹으려고 달려간 농장에서 충격받고 책을 읽는 늑대를 보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책의 또 다른 기능에는 뭐가 있을까. 《아름다운 책》을 보면 아주 실용적인 책의 가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토끼를 잡아먹으러 온 늑대를 잡는 일이다. 《난 무서운 늑대라구!》에서의 늑대는 교양이 넘치는 늑대로 거듭났지만 《아름다운 책》의 늑대는 본성에 충실하다. 그래서 토끼 형제가 책에 빠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틈을 이용해 잡아먹으려 한다. 깜짝 놀란 에르네스트는 책으로 늑대를 내리쳐서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 거야."라고.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책을 읽으며 온갖 상상을 다한다. 무시무시한 초록용을 때려 눕히기도 하고 사자나 여우를 마음대로 조종하기도 하는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책을 읽을 때만큼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처럼 어린이도 책을 읽으며 온갖 상상을 할 것이다. 그러다 에르네스트 형제처럼은 아니어도 다른 실용적인 가치를 찾아내기도 할 테고. 이를테면 집 짓는 도구라던가 소꿉장난의 밥상이 될 수도 있고 어른들이 흔히 사용하는 베개가 될 수도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의 부모는 상당히 걱정을 한다. 그것은 대개 관심사와 전혀 상관없는 책에 질렸거나 재미없는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과는 담을 쌓았던 브루노가 어떻게 책에 관심을 갖는지 지켜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브루노는 올라네 집에 놀러와도 그 많은 책에는 눈길도 안 준다. 오로지 장난감에만 신경쓸 뿐이다. 하루는 올라가 작정하고 브루노를 책 속 공간으로 초대한다.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올라가 브루노를 이끌고 가지만 돌아올 때는 브루노가 올라를 데리고 온다. 브루노가 집으로 돌아가며 올라에게 또 한 번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 브루노는 책을 좋아할 것이다. 이렇게 책 안 읽는 브루노는 책과 쌓았던 담을 무너트렸다. 내가 수목한계선 때문에 나무가 없이 작은 풀만 펼쳐졌던 덕유산 꼭대기에 올라섰을 감동 이후로 산을 좋아했듯이 어린이도 한 번의 신기한 경험으로 충분히 책과 친해질 수 있다.
옛이야기에서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꼭 돌아보듯이 사람은 하지 말라는 일은 이상하게 더 하고 싶다. 그래서 역으로 유혹하는 책도 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꼭 열어보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이 책을 절대로 열지 마시오》는 아직 책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인데 독자는 그 새를 못 참고 그만 책을 열고 만다. 주인공 돼지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짜인지 돼지가 만드는 이야기가 진짜인지 헷갈리지만 다양한 단어로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다. 《낱말 수집가 맥스》도 이와 비슷한 방식의 이야기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낱말을 모았다가 그 낱말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맥스를 통해 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책을 읽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질곡을 살기에 그럴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고 순탄해 보여도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책은 무엇일까. 책 속에 있는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득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열면 아침이 되고 책장을 덮으면 밤이 되는 '책'에서 사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가만히 살펴보니 각자 이야기가 하나씩 있다. 서커스 광대를 이야기하는 아빠와 소방관으로 일하는 엄마 이야기, 심지어 고양이와 강아지까지 이야기가 있지만 주인공 여자 아이는 이야기가 없다. 《이 책을 절대로 열지 마시오》는 책의 줄거리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책》은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지에 초점을 둔다. 여자 아이가 위를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 책장 좀 덮어달라고 말하는 글을 읽을 때는 약간 당황스럽고 황당하지만 이내 웃지 않을 수 없다. 메타픽션 형태를 사용한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을 하면서.
책은 보는 것이며 읽는 것이다. 그런데 책은 먹는 것이라고 우기는 누군가가 있으니 《책 먹는 여우》의 여우와 《와작와작 꿀꺽 책 먹는 아이》의 헨리가 그들이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그 종이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책을 먹는다니 어떻게 먹는지 살펴봐야겠다. 여우 아저씨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먹고 헨리는 그냥 와작와작 먹는다. 책이 맛있기 때문에 읽고 나서 먹는 여우 아저씨와 달리 헨리는 먹으면 바로 읽은 효과가 나타난다. 여우 아저씨는 더 이상 책을 산 돈이 없어 책을 훔치다 들켜서 감옥에 갔기에 책을 못 먹는 대신 헨리는 배탈이 나서 지식이 모두 엉켜 책을 못 먹는다. 책을 소화시키지 않고 무조건 먹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던 셈이다. 여우 아저씨는 먹을 책이 없자 급기야 책을 스스로 만들어 먹기로 하고 글을 썼는데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헨리는 아주 단순한 결말에 이른다. 이제는 책을 먹지 않고 보기로 했다는 것. 그래, 책은 읽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읽는 것이 아니라 소화를 시키면서 읽어야 탈이 나지 않는다는 점은 기억해야겠다.
때로는 책을 보며 책과 관련된 직업에 이런 것이 있구나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를리외르다. 예술제본가라고 하는데 유럽에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런 직업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를리외르도 많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를리외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 데는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가 큰 몫을 했다.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를리외르는 고된 직업이란다. 책을 하도 많이 봐서 겉표지가 떨어져나간 책을 주인에게 꼭 맞는 표지로 새로 만들어주는 를리외르 아저씨의 모습에서 책(내용이 아닌 책,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업이 바로 사서다. 이라크에서는 전쟁 속에서도 책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을 구하기 위해 애쓴 한 사서가 있으니 바로 알리아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책을 구한 사서》와 《도서관을 구한 사서》라는 제목으로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으며 신기한 경험을 하거나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도 있다. 양면에 거울이 붙은 엘리베이터에서 앞을 바라보면 거울 안에 내가 있고 그 안에 거울과 또 내가 있고… 이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영상을 만난다. 책 속에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계속 나타난다면 어떨까. 이 책 《책 속의 책 속의 책》을 보며 그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책을 읽고 있는 아이가 그 책 속에서 똑같이 그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안에 거울에서처럼 끝없는 그림이 보이고, 어휴 설명하기도 힘들다. 《책》에서처럼 메타픽션 기법을 사용했는데 독자가 단순히 작가가 이야기하는 책을 '읽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작가와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줘서 책을 읽을 때는 약간 머리가 아프지만 읽고 나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을 한 느낌이 든다.
책이 꼭 거창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줄 필요는 없다. 때로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새로운 인물이나 직업을 만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재미있게 읽고 또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된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처럼 책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현실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하고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기를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린이에게 바라는 책 읽는 방식이다.
* 책에 대한 책
《브루노를 위한 책》
《이 책을 절대로 열지 마시오》
《와작와작 꿀꺽 책 먹는 아이》
《책 먹는 여우》
《난 무서운 늑대라구!》
《아름다운 책》
《책 속의 책 속의 책》
《책》
《책 빌리러 왔어요》
《쉿! 책 속 늑대를 조심해》
《책 읽어주는 고릴라》
《책 읽는 나무》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책》
《책을 구한 사서》=《도서관을 구한 사서》(이라크 알리아 이야기)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 도서관과 관련된 책
《도서관에 간 사자》
《도서관》
《일기 도서관》
《도서관에 가지마, 절대로》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
《똥 싸는 도서관》
《도서관의 비밀》
《도서관에 간 박쥐》
《도서관에 개구리를 데려갔어요》
《도서관에서는 모두 쉿!》
《도서관에 간 공주님》
《유령 도서관》
《도서관은 어떤 곳일까?》
《도서관에서 생긴 일》
《도서관에서 처음 책을 빌렸어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도서관에 도깨비가 으히히히》
《도서관이 키운 아이》칼라 모리스 글/브래드 스니드 그림/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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